순례길 13

[Buen camino] 마지막 걸음은 나와 함께

2009.11.11 브루고스에서 하루종일 노닐기 어제는 피곤했던 모양인지 12시에 잠이 들었고 중간에 땀이 날 정도로 더워 입고 자던 스웨터를 벗느라 잠시 깨었던 것 빼고는 참 잘 잤다. 베드벅 걱정 없이 쾌적하게 잘 잔 날이다. 알베르게에서 또 묵는것은 불가능했고 8시부터 2시까지 알베르게가 문을 닫는 동안 짐을 맏기고 부르고스 시내 산책을 하기로 했다. 그동안 말수가 적었던 한 친구가 말을 건네온다. 안토니오다. 어제 타르코프스키의 안개 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야속한 친구다.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 싶다며 블로그나 사이트가 있으면 알려 달라고 한다. 서로 메일을 교환하고 이번 여행은 블로그에 잘 정리해 두어야겠다 생각한다. 이미 벌써 해외의 독자 하나가 생기지 않았나. ‘센티’혹은 ‘진’으로 통하는 ..

[Buen camino] 말보다 더 통하는건 느낌

2009.11.09 벨로라도-아게아 : 24km "이봐, 아가씨. 일어나야지 않어?" 거북이 아저씨가 깨웠다. 어제 내 주위의 모든 소리는 코고는 소리였다. 참고 자느냐 배낭에서 귀마개를 꺼내느냐를 잠결에 고민하다가 귀마개를 사용하기로 했다. 아 정말 카미노는 다 좋은데 이 것만큼은 견디기 어렵다. 어제 들은 정보를 종합해보면, 앞으로 2일은 더 비가 올 것이며 (물론 어제와 같이 강풍을 동반한 비바람) 웬만한 알베르게는 문을 닫았으며, 12킬로지점에 있는 알베르게는 1시에 문을 여는데 예상대로면 12시도 안되게 도착. 앞으로 12킬로 지점의 알베르게는 거지소굴로 유명하다는 곳. 패스요함. 그리고 약 4킬로 떨어진 지점에 그나마 괜찮은 곳이 있다고 했음. 그러니 12시부터 16킬로를 더 걸어야 하는데 역..

[Buen camino] 단 일주일이면 어떠한가 싱그러운 바람만으로도 족하다

2009.11.08 칼즈-벨로라도 : 23km 초반부터 비다. 앞으로 삼일간 비가 온다는데 징하다. 오늘 중간중간 마을이 있으니 비가 심하게 내릴 경우 벨로라도 까지 무리해서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 달 휴가를 신청하고 항공권을 발권할 때부터 지금까지 세세한 계획은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리턴일만 정해두고 카미노 길 위에서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할 생각이다. 카미노에 겨울은 이렇게 오고 나는 이제 서서히 카미노 여정을 마무리 해야겠다. 같이 일주일을 걷고, 홀로 일주일을 걷고, 또 일주일은 홀로 대도시를 여행하고 나머지 사흘은 유럽을 오가는데 시간을 쓸 것이다. 첫 번째 마을 그라농에서 카페 솔로 한 잔을 마시고부터 비바람에 발걸음을 옮기기도 힘들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빗..

[Buen camino] 카미노의 겨울은 비와 함께 온다

2009.11.07 나헤라-칼즈 : 21.2km 출발부터 비가 올 듯한 하늘이기에 초반부터 판쵸를 뒤집어 썼다. 오늘 길은 비교적 수월했다. 한시간 반 만에 아스포르 마을에 도착했다. 아침을 치즈와 빵과 함께 마치고 카페에 들어가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셨다. 작디 작은 잔에 설탕 가득 한 스푼 넣으면 쓰고 달콥 쌉싸름한 깊은 맛에 중독된다. 걷다가 카페가 보이면 몸은 자동 반사로 들어간다. 산길에 들어서자 빗발이 거세지고 바닥은 순식간에 질척거린다. 처음엔 물이 닿지 않도록 신경 쓰다가 발바닥부터 빗물이 들어차고 부터는 자포자기 심정이 되었다. 그냥 막 걸었다. 발은 시려워도 걷다보니 열기가 생기면서 견딜만해졌다. 손과 귀가 시려워서 장갑 모자, 갖고 있던 옷을 다 꺼내 입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막 겨..

[Buen camino] 그 이름 들어는 봤나, 퓨전 좁쌀 파스타 스프

2009.11.06 나바레테-나헤라 : 21km 어제밤 전화벨 소리에 깼는데 창문이 어찌나 잘 봉했던지 낮인지 밤인지 알 수가 없다. 그때가 12시. 한국에서 송교수님이 건 전화다. 한국에서 7시좀 넘어서니 교수님이 어지간히 일찍 아침을 시작하신다. 잘 다녀오라는 안부 메세지를 전하시는데 뭉클하다. 3년 후 이 길을 걷고 싶다고 하시는데 내가 선 경험자가 되었다. 다시 발바닥 통증과 근육통이 찾아온다. 물집에는 이제 피가 고였다. 그냥 호텔방에서 퍼지기로 했다. 조금 늦게 출발하면 어떠하리오. 오늘 걸어야 할 킬로는 16 킬로미터로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해가 중천에 뜰때까지 뒤비적 거리다 나왔다. 비는 또 추적추적 내리고 아흥~~ 판초를 뒤집어 썼다. 안녕하세요? 뒤를 돌아보니 거북..

[Buen camino] 때로는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어

2009.11.05 비아나-나바레테 : 21.5km 8시에 기상. 나의 늦잠에는 이유가 있다. 아래층 침대에서 머문 코골이 부자는 최고의 가창력을 자랑한다. 둘이서 번갈아 박자를 맞춰가며 밤새 리듬을 탔다. 귀마개도 소용없었다. 아침, 그들은 너무도 개운한 잠을 자고 난 듯 마알간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나는 눈에 핏발이 선 채로 욱하는 맘을 달래야했다. 출발은 조금 쌀쌀. 로고르뇨로 향하는 길은 대체적으로 평탄했다. 2시간 만에 로고르뇨에 도착했고 바에 들어가 또띠아와 커피를 마셨다. 또띠아는 생감자를 달걀과 함께 오랜시간 불에익힌 스페인 대표요리다. 로고르뇨는 조금 큰 도시였지만 공장도 많고, 여기저기 공사중인 건축물들도 눈에 띄고 대체적으로 낭만은 덜 한 도시였다. 느낌이 좋았다면 로고르뇨에 머물 ..

[Buen camino] 그저 지나가는 바람

2009.11.04 로스아르코스-비아나 : 19.5km 내가 눈 뜬 시간은 7시 30분. 점점 기상시간이 늦어진다. 조금씩 적응해가는 덕이겠지. 관광객 모드로 돌아간 태권브이와 광년이는 늦잠을 더 즐기고 싶어했으나, 나의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깼다. 지금까지 일주일을 함께 걸었다면, 앞으로 일주일 이상은 혼자 걸을 것이다. 아침부터 비는 부슬부슬 내렸다. 이런 마른 땅 밟기도 힘든 마당에 진탕길을 걷게 생겼군. 짐을 1g이라도 줄이기 위해 배낭 커버를 부쳐버렸기에 판초를 쓰고 걸을 수밖에 없다. 기다란 자락이 참으로 걸리적거린다. 산길을 따라 걸으며 먹구름이 수없이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며 비를 뿌리고 거두고, 나 또한 땀이 차오르는 판쵸를 벗었다 입었다 해야 했다. 비보다 더 성가신 것은 신발에 붙..

[Buen camino] 하룻쯤 더 머물러도 좋아

2009.11.03 어젯밤 파티를 같이 보낸 사라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후의 한가로운 때를 즐기고 있다. 아침에 빨래도 하고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식재료도 사오고 동네도 어슬렁거리다. 한국인 남자사람이 쉬어간다며 들어왔다. 문득 내 노란 슬리퍼에 시선을 두더니 독일인 마크 이야기를 한다. 노란 신발의 한국 여자 이야기를 했나보다. 첫날 피레네 산맥을 못 넘고 있는 나를 경찰에 신고해 준 친구다.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나? 카미노에서 나의 정체는 '노란슬리퍼를 신고 피레네에서 퍼졌던 그래서 실종신고됐던 한국여자'가 된 것이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느리지만 잘 간다. 빨래 말리고 식사하고 발의 물집 처리하는데 벌써 한 시다. 아 이곳에서의 시간은 느리지만 잘 간다. 앞으로 남은 2주일을 보낼 계획을 세워보지만..

[Buen camino] 드디어 친구가 생기다

2009.11.02 에스텔라 - 로스아르코스 : 21.8km 어제 비가 온 뒤 제법 쌀쌀해진 기온으로 상쾌한 걷기가 시작되었다. 새끼발가락 물집을 실리콘 밴드로 동여매고 만반의 준비로 걷기 시작했다. 날씨가 변덕이다. 첫 번째 고개를 넘어서자 먹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내리쬔다. 황토 빛 땅이 환하게 개고 맑은 하늘이 드러난다. 반가운 산티아고 길의 날씨다. 두 번째 고개를 넘어서자 바람이 마구 불기 시작한다. 갈대길 사이로 갈대보다 더 흔들리는 바람이다. 그리고 슬슬 춥다. 땀이 나기도 전에 식어버렸다. 그래도 비를 맞고 걷게 되지 않음에 감사하나 어찌나 바람이 세게 부는지 발걸음을 옮기기도 힘이 들 정도다. 이때 나의 장갑과 귀가리개가 딸린 모자가 위력을 발한다. 물론 바람막이가 되어줄 나의 주황색 점퍼..

[Buen camino] 불타는 발바닥을 지긋이 즈려밟고

2009.11.01 푸엔테 라 레이냐-에스텔라 : 22.4km 오늘은 불나는 발바닥과의 투쟁기가 되겠다. 발바닥 뒷굼치 굳은살에 자리 잡은 두터운 물집, 전체적으로 발을 조이는 등산화 덕에 살을 파고드는 엄지발톱의 고통. 그리고 자꾸 새로이 잡히는 발바닥의 부분적인 물집들. 가장 힘든 건 발을 디딜 때 마다 느껴지는 발바닥 통증이다. 발바닥 뼈로 바로 다가오는 통증들. 오늘은 일행들 중에서 맨 꼴찌로 걷곤 했다. 가끔은 걷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만사가 귀찮다. 발바닥만 괜찮다면 14 킬로의 짐도 견딜 수 있다. 불타는 발바닥을 느끼며 신선놀음 하던 나는 드디어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나 왜 여기 있는거니?? 발바닥에 물집까지 잡혀가면서 이곳에서 떠날 생각도 못하고 있는 나는 뭔가. 출발 기세대로라면 '즐..